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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4. 24世 〉15. <부정공>의암공휘대훈묘갈명(義菴公諱大勳墓碣銘)
1. 문헌 목록 〉24. 24世 〉17. <부정공>종훈(宗勳)配 유인전주이씨전(孺人全州李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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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호암보훈행장(虎巖寶勳行狀)
호암 보훈 행장(虎巖 寶勳 行狀) 虎巖(호암) 趙寶勳(조보훈)선생은 玉川趙氏 24世이시다. 上祖(상조)는 諱(휘) 璋(장) 高麗檢校大將軍(고려검교대장군) 門下侍中(문하시중)이시고 4世는 忠獻公(충헌공) 諱(휘) 元吉(원길)이며 5世는 虔谷公(건곡공) 諱(휘) 瑜(유)이시며 6世는 參議公(참의공) 諱(휘) 斯文(사문)이시다. 公(공)은 7世 參判公(참판공) 諱(휘) 智崗(지강)의 후손인 아버지 諱(휘) 東照(동조)의 長男으로 1946년 11월 9일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初名은 寶城(보성)이요 號는 虎巖(호암)이다. 配(배)는 咸陽朴氏(함양박씨) 奎熙(규희)의 딸이며 一九五○年(庚寅)十二月二十七日生이시다. 슬하에 2남을 두셨는데 長子(장자)는 晟佑(성우)이고 次子(차자)는 儧容(찬용)이다. 長子(장자) 晟佑(성우)는 딸 셋을 두었는데 瑞娟(서연), 秀彬(수빈), 恩彩(은채)이다. 또 次子(차자) 儧容(찬용)은 1남2녀를 두었는데 帝俊(제준)과 睿潭(예담)과 娟我(연아)이다. 선생의 할아버지 연종(淵宗)께서는 斗酒不辭形(두주불사형)으로 매우 호탕하셨다고 한다. 부친 동조(東照)께서는 虎視牛行形(호시우행형)으로 매사에 의연하셨고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신 분이셨으며 어머니께서는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고 자식들의 친구에게 항상 다정하셨다. 虎巖(호암) 조보훈 선생은 할아버지의 의협심과 부친의 냉철한 판단력과 과감한 실천 정신을 이어 받아 운동을 좋아하고 의리를 지키는 성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친구들 중심에 있었다. 유달리 많은 친구가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선생의 고향인 주암면은 당시 승주군 10개 읍면 중에서 대학생이 제일 많은 향학열이 높았던 고장이다. 또한 백강 조경한 선생님과 춘산 조연하 선생님등 정치인을 많이 배출한 고향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였는지 평소 부친 동조(東照)께서는 아들이 법대나 정치학과에 진학하기를 권했다. 순천 매산고를 거쳐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가능했음이다. 虎巖(호암)선생이 돈보다는 명예와 신의를 소중히 여겼던 것도 평소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 군대생활 일화가 있다. 1969년 삼선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반대투표를 했다는 이유로 헌병대에서 수갑을 채워 체포하여 군대 영창에 갇혀서 2주간 기압과 구타를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튼튼하던 양쪽 이빨이 나가버려 지금까지 의치에 의존하고 있다. 선생의 정의감에 대한 굳은 신념을 말해주며 정치에 대한 연민이 불타오르게 한 사건이다. 한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였으며 순천에서 매산고 동창으로 단짝인 허여랑과 손형남과 함께 화물회사를 차려 사업을 시작하여 1982년에는 동하화물을 운영하여 사업에 성공하여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꿈꾸어 왔던 정치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가 없었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10민주화운동의 열풍속에서 13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虎巖선생은 당시 미국에서 귀국하여 평화민주당 국회의원에 출마한 조순승박사를 도와 달라는 春山(춘산) 趙淵夏(조연하)선생의 부탁으로 평화민주당 승주·구례지구당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였다. 모든 선거사무와 재정문제를 책임지는 자리에 임명되어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조순승 후보는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지구당 사무국장으로 일한지 3년 후 1991년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전라남도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5년 6월에 도의원 재선에 올랐다. 한때 국회의원 출마와 승주군수 출마를 고려하였으나 현직 국회의원이 집안 종친이었고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뜻을 접어야 했다. 재선 도의원이 되어 내무위원장과 부의장을 지냈다. 도의원 시절 주암호가 담수를 시작하고 주암면 등 농경지 수몰과 잦은 안개로 인하여 농축산업에 심각한 문제는 물론이고 주민들은 안개상습으로 관절염과 천식 등이 발생하여 건강상의 문제가 심각한 상태였다. 선생은 주암호와 관련한 주민들의 고충 해결을 위해 누구보다 열과 성을 쏟아 부었다. 대표적으로 음성나환자가 운영한 한동농원을 이주시켰고 송광면 후곡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5선 국회의원이신 허경만의원이 초대 민선 전라남도지사에 출마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김대중 선생이 총재였다. 전라남도 도지사 후보는 민주당 최고지도부에서 밀고 있는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성훈 후보였다. 허경만 후보는 주류가 밀어주는 후보가 아니었다. 간곡한 부탁으로 허경만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정치의 운명을 함께 걸었다.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에서 경선을 치러야 했다. 치열한 경선이었다. 경선의 승리는 곧 도지사의 당선이었다. 단 1표의 차이로 승패가 갈릴 상황이었다. 선거사무실은 밤낮이 없었다. 두 달 동안 여관에서 사무실로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뛰었다. 결국 단 36표 차이로 승리했다. 2개월 만에 자정에 귀가했는데 새벽 5시 초인종이 울렸다. 허경만 후보와 사모님이 꽃바구니를 들고 오셔서 따뜻한 정을 함께 했다. 1998년 허경만 지사와 조보훈 선생은 정치적인 동지가 되어 허경만 지사는 재선에 성공하였고 조보훈 선생은 정무부지사로 임명되었다. 정무부지사의 업무는 중앙당, 언론, 의회와 집행부와의 가교역할이다. 쾌활한 성격으로 그동안 당직자로서 재선의원으로서의 경륜이 도정업무 수행에 날개를 달았다. 민원이 생길 때는 매사에 상대방의 입장을 끝까지 경청하고 뒤엉킨 실타래를 풀었다. 각종 언론에서 민원인들이 울고 왔다가 웃고 나간다는 민원해결사라고 지칭하였다. 공직자는 비가 와도 걱정 안와도 걱정이다. 공직자는 매사에 책임감이 제일이라는 신념으로 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처했다. 발로 뛰고 몸으로 부대끼며 도정에 임했다. 順天者興(순천자흥). 하늘을 따르는 자는 큰일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각오와 좌우명으로 1998년 7월부터 전라남도 정무부지사에 취임한 후 2002년 1월까지 전국 최장수 정무부지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동안 정치에 입문하여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 2002년 무소속으로 순천시장에 출마하게 되었고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 전남도지사 경선후보로 나섰다. 말도 안되는 흑색선전에 휘말리고 너무 믿었던 공천에 대한 배신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과 도민들이 도와주신 것은 그동안 헛되이 살아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2005년 7월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국가산업단지의 개발과 관리 그리고 입주 기업체의 생산 활동을 지원하는 지식경제부 준정부기관이다. 43개의 산업단지와 3만 2천여 입주기업과 73만의 가족이 있다. 3년 6개월의 재직기간 동안 율촌지방산업단지를 활성화하여 순천 여수 지역의 지역경제에 일조를 담당하는 등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즈베기스탄, 중국, 불가리아 등과의 산업단지개발 협약 체결과 개성공단 개발과 대불산업단지클러스트 추진 등 현안사업을 챙기는데 보람을 느꼈다. 조보훈 선생은 玉川(淳昌)趙氏로써 자긍심과 애족심이 강하였다. 도의회 부의장과 전라남도 정무부지사로 재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문중 宗事(종사)에 관한한 열정을 다했다. 5世祖 趙瑜(조유)할아버지를 모시는 靖獻齋(정헌재) 제각과 문중의 자랑인 相好亭(상호정)을 문화재로 등록하였으며 순천시 일원의 수많은 유적지를 유지 보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018년에는 옥천(순창)조씨 대종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종친들 간의 화합과 종회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특히 그동안 책자로만 인쇄하여 전해 내려온 족보를 電子族譜(전자족보)로 전환하여 전국 종친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전자 족보는 우리나라 여타 문중보다 먼저 선도적으로 시작한 사업으로 많은 타 문중들로 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 문중에서 발간한 책자 족보를 일일이 데이터로 구축하여 세계 어디서나 컴퓨터 또는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조상님과 일가친척의 족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2020년에는 芝南齋(지남재)와 三世壇(삼세단)과 4世祖 趙元吉(조원길)묘소가 있는 세장산 일원을 성역화 하였다. 조순팔(보명 조동복) 종친께서 금원 1억5천만원을 쾌척하는 등 물심양면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21년에는 부단한 노력으로 전라남도의 문화재 지원금 15여억원을 지원받아 상호정과 겸천사 및 겸천서원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이와 같이 조보훈 선생의 애족심과 문중의 발전에 대한 열정은 우리 문중 종친들의 귀감이 되었다. 호암 조보훈 선생이 걸어온 발자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즈베키스탄國立사마르칸트外國語大學行政學博士(행정학박사) 우즈베키스탄世宗한글學校建立委員長(初代理事長및後援會長) 全羅南道道議會四代五代議員(內務委員長) 全南道道議會議長(전남도도의회의장) 全南道廳移轉特別委員會委員長(전남도청이전특별위원회위원장) 光州全南行政學會會長(행정학회회장) 亞太平和財團中央委員(아태평화재단중앙위원) 環境部外來魚種硏究會會長(환경부외래어종연구회회장) 全羅南道第三代政務副知事(전라남도제3대정무부지사) 全南障碍人協會會長(전남장애인협회회장) 嶺湖南和合八個市道知事협의회總務 열린우리당順天地區黨委員長(중앙당무위원) 韓國産業團地工團理事長(한국산업단지공단이사장) 韓國産業團地(한국산업단지)클러스터全國本部長 국토해양부土地規制審議中央委員(토지규제심의중앙위원) 國會(국회)環境(환경)포럼政策諮問委員長(정책자문위원장) 大宗會會長(대종회회장)歷任 靖獻齋(정헌재)文化財登錄및宗中崇祖顯揚事業(현양사업)에큰業績을남긴功勞로大宗會感謝牌(대종회감사패)受賞 大韓民國장한韓國人賞受賞(地方自治行政發展功勞)(二○○九年) 著書(1)조보훈쓴소리단소리著書(2)나의인생나의도전 2021년 5월 일 前 順天市長 溫陽人 方成龍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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